작년 딱 이맘 때(2008.6.26) 였습니다. 그때 저는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해발 500고지 능선을 박박 기고 있었지요.
국방부 출입기자로 들락거리던 그 시절, 저는 국군의 유해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앞뒤가리지 않고 그곳을 찾았습니다만 기자란 게 알고보면 게으른 생물인데다, 미친소와 미친사람들로 정신없던 시기라 모인 기자들은 얼마되지 않았었지요.
그래도 이때의 취재만큼 숙연한 기분이 들던 때도 없었습니다.
그때의 사진들을 다시 정리해 올립니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해발 500고지.
그곳은 지난 1951년 악몽의 1.4후퇴로 대변되는 중공군의 신정공세와 4월 공세에 맞서 수개월간 대소 3회의 전투를 벌이던 국군 2사단, 6사단의 장병 2000여명이 산화한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서 국군 유해발굴 감식단과 맹호부대 장병들은, 26일(2008년 6월) 정오 초여름의 뙤약볕 한가운데에서도 흐르는 땀을 마다않고 묵묵히 흙을 파내고 땅밑의 유물을 조심스래 끄집어내고 있었지요.
저가 그곳에 도착할 때 까지 수습된 유골은 22구, 아직도 발굴중인 유골은 12구.
아직까지도 수습되지 못한 국군전사자 13만, 그중에서도 남한일대에 흩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6~7만명중에 지극히 일부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57년만에 다시 햇빛을 보게되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그 현장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지요.
▲ 지난1951년 초, 국군 2사단과 6사단이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던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해발 500고지에서는 국군 유해발굴 감식단과 맹호부대 장병들의 유해발굴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일명 오렌지 츄리닝을 입은 병사들이 맹호부대, 감색바지에 조끼를 입은 병사들이 유해발굴 감식단 소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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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작업이 완료되어가던 유골 표면의 흙을 조심스래 대나무 칼과 브러시로 긁어내는 유해발굴 감식단의 장병들의 모습입니다. 대게 자원병들로 사회에서 사학, 인류학, 고고학 같은 관련분야를 전공했다고 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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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자의 두개골에 햇빛이 내리쬐이고 있습니다. 과연 얼마만에 다시 보게된 햇빛일까? 전투가 벌어진 1951년에서 역산해본다면 대락 57년만이었습니다.(2008년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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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드러난 다섯 전우의 유골과 잔해들. 맨 아랫쪽의 유골은 척추 아래만 남아있어 얼핏봐서는 4명만 발견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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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골의 발굴 전후를 설명하는 발굴단장 이용식 중령님. 그야말로 이일에 신명을 바치신 분이었습니다. 이분의 설명에 의하면 유골이 매장된 지역은 당시 사창리에서 양평까지 걸쳐진 퇴각로로, 전사한 체 방치된 국군의 시신을 미처 피난가지 못했던 지역주민들이 가매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사실을 당시 14살이었던 지역주민 권경행 옹(72세)가 감식단측에 제보해, 발굴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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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신 주변에 널부러진 M-1소총 탄피와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형체를 알수 없을 정도로 짜부러 진 수통은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무언으로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비닐 조각은 살아남아 후퇴하던 전우들이 미처 매장할 틈이 없어 시신위에 덮어둔 것으로 추정되는 판초우의 조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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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희 국방장관도 발굴현장에 찾아와 유해에 헌화하고, 묵념했었습니다. 이 사업의 지속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관심, 나아가 군 지휘부의 관심이라고 유해발굴 감식단은 강조해왔고, 국방장관의 방문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이용식 유해발굴 단장은 국방장관 방문에 앞서 기자단을 향해 "지휘관이 관심을 가지면 대한민국군대에서 안될 것이 없다"면서 유해발굴에 지휘부의 관심이 좀더 높아질 것을 열망했고, 이 작업을 군의 교육훈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었지요. '교육훈련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는것이 정신무장이다. 6.25가 북침이라느니 언제 났는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요즘 신세대의 현실에서 이것이야 말로 전쟁의 산 증거아닌가?'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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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발굴현장입니다. 여기에 묻힌 유골은 일단 1구로 추정되지만, 신발로 추정되는 유물은 3점이 나와 좀더 확인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발굴단장의 말대로 "곡괭이로 파기만해서 다되는 작업이 아니다."는 것이 실감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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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한점 한점 수습된 유골은 고무매트 위에 올려 짜맞춘 뒤, 확인이 끝난 순서대로 정성을 다해 입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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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골을 담는 작은 관들입니다. 태극기로 둘러싼 것은 수습이 완료된 유골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아직 빈 관이었습니다. 이날까지 발굴된 유골은 22구, 아직까지 작업중인 유골은 12구였습니다. 이들의 유골은, 지난 3월부터 6월 말까지 경남 함안ㆍ경기 가평 등 15개 지역에서 발굴된 국군 전사자 403위에 포함되어 다음날 국립현충원에서 합동 봉안식을 가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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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보자인 권경행 옹 이십니다. 권 옹은 국방장관과의 인터뷰에서 "중공군은 전쟁당시 에도 아군의 시신을 대부분 수거했었고, 미군은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시신을 거의 수거했으나, 국군의 시신은 지금까지도 (가매장한 그대로) 방치되었었다"더군요. "그래도 때늦게나마 시신을 수습하는 장병들이 자랑스럽다"고 덧붙였으나 실로 우리 후손들의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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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현장을 벗어나면서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은 사진입니다. 한 참호에 같이 매장되어 있던 '두 전우'의 시신이었습니다. 어디에 시신이 흩어졌는지 가족도 알수 없이 잊혀진 57년만에 그들의 유골위로 햇빛이 다시 비춰졌습니다. 이들은 현재까지 발굴된 유골 3009구. 국군 전사자 13만명의 2.3%중에서도 극히 일부입니다. 이들외에도 조국의 산하에 흩뿌려진 선열들의 육신이 완전히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 일지라도 다시 발굴되어 햇볓을 보고 유족의 품에 돌아가길, 취재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더 기원하며 포스팅을 마무리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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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IS NOT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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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되는 일에 목숨 거는 바보'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면서도 정작 제가 그 바보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부끄럽네요.
역시 이런 것도 국력의 차이인가 봅니다... 중공군의 경우 그냥 죄다 버리고 갔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닌 것을 보니 ... ;;;
그분들 덕에 우리가 있으니...
자유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뭐... 대략 예술가들 중에 자신에 대한 후원을 거절하거나 들볶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등장시킨 예가 있다고 들은 바 있어서... -ㅅ-;